<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오늘을 살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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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많이 흘렀다. 마음이 마음에게 말하고 사랑이 사랑에게 말하던, 그 시간들은 지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잘 인지하고 있다. 헌데, 이 사실을 잘 잊어버리고 있다가 가끔 소스라치게 피부로 가깝게 느낄 때가 있다. 덩그러니 나 혼자 서있는 오묘한 기분.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린 지 수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큰 덩치가 내 바로 옆에 서있는 기분이 드는 때가.


 사람은 각자의 고유한 향과 멋을 간직하며 산다. 장점도, 배울 점도, 미쳐버리게 만드는 점도, 지긋지긋한 점까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내 옆에 섰던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깊이로 부족한 날 감싸주곤 했다. 모자라고 아픈 나를 보듬고 마치 가장 소중한 존재처럼 돌봐주었다. 지금 와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들의 인내심을. 내가 감히 헤아리지 못하고 상처를 냈던 그 여린 마음들을. 고맙고 귀했던 그 마음들을.


 그렇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늘 불안했지만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을 마음껏 주고 싶었다. 사랑에 목매고 싶지 않았지만 매번 빠져 허우적 대는 자신과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삶을 배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손을 잡았던 인연들에게서.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배웠고 성장했으며 아직도 진행형이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친구나 동료, 상사나 선배에게 배우면 되지 않느냐, 하면 그것과는 다른 모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두가 소중한 배움이다.


 사랑 예찬론자나 로맨티스트는 아니지만 늘 손이 닿는 거리엔 사랑 또는 그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 셀 수 없는 연서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게 어떠한 결핍을 통해 생성된 것인지, 왜 그들은 나에게 사랑을 바랐는지 등과 같은 수많은 질문들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전부 해소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감과 함께 책과 사람, 경험을 통해 얻는 정답과 가까운 것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사실이다.


 ‘toxic love relationship’이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직역하면 중독적인 사랑 관계, 유해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관계에서 지배적으로 드는 감정 한 가지는 불안이다. 서로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고 늘 불안하며 떨어져 있을 때 상대방이 내 안에 있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한다. 따라오는 감정으로는 분노, 불신, 공허 같은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강한 감정과 우울하고 낮은 지점의 감정들을 연속해서 동시에 느낀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두 가지 감정의 조합은 늘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하지만 헤어 나올 수 없는 것, 이것이 중독적인 관계다.


 맹세코 단 한 번도 중독적인 사랑 관계를 원한 적이 없다. 머문 적 또한 없다. 순간 빠져본 적은 있지만, 금세 헤엄쳐 나왔다. 내게 확신을 주지 않고 늘 불안하게 만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고, 피했다. 안정적이며 늘 주는 것만큼 또는 그 보다 더욱 많은 사랑을 돌려주는 좋은 사람이 운 좋게도 내 옆에 있었다. 건강한 관계에 마음을 담가왔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을 손익 분기점 계산하듯 할 수는 없었고, 그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열정적인 누군가의 진심을 받아 온 셈이다. 지금도 내 사전에 ‘toxic relationship’은 없을 것이고, 가능하면 ‘healthy relationship’을 지향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적다 보니 또 성찰과 관련된 뻔한 글이 될 듯한데, 일상에서 얻는 조각들이니 어쩔 수 없음.


 살다 보면 가끔은 나 자신과 타협해야 할 때가 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살아왔건만 몸에 하나 둘 늘어가는 타투를 보면서 지난 시간을 실감하고, 이제는 그 시간 위에서 이제는 조금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머뭇거리게 된다. 그런 나이다, 철없는 고찰이 막연하게 짙어지는 30대. 생각 않고 저지르는 과감한 용기는 더 이상 낼 수 없는, 마냥 어리지만은 아닌 나이다.


 오늘 적고 싶은 책은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다. 몇 년 동안 먼지만 쌓이던, 책장 속 가장 어두운 코너에 박혀있던 책이다. 왜 펼치기가 힘들었냐면 나의 이상적인 삶에 대한 교훈이 가득 담겨 있는 책인데, 펼치면 가장 첫째 장에 이 책을 선물한 사람의 정성 어린 손글씨가 나를 맞이했기 때문에 다시 고이 닫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다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벌써 몇 달 하고도 몇 주가 지났다. 이 책으로 인해 아무도 모르는, 그리고 몰라야 할 내 안의 조그만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기에 글을 써야만 했다.

삶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원하는 어떤 것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원하는 그 마음을 내버려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하면서 명료한 글이 또 있을까 새삼 깨달았다. 이 교훈이 내 마음에 다시 새겨진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이 책을 매일 집 밖을 나갈 때 잊지 않고 가방에 넣을 정도로 깊이 빠졌다. 시간이 날 때마다 펼쳐보고 위로를 얻으며 안정을 되찾는다. 활자에 대한 집착은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욕망의 자유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중 가장 평범한 축에 속하는 나는 늘 글과 씨름한다. 음악과 씨름하던 때의 나와는 또 다른 자아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근데 왜 맨날 씨름만 하냐고, 언제 이길 수 있는지 아는 사람 귀띔 좀 해주라고 제발.


 내가 고수하는 삶에 대한 어리석음은 끝이 없다. 그렇기에 현명함을 갈구한다. 보통적으로 얻어왔던 성찰과 경험은 어느 날 멈출지도 모르기에 더욱 매달리고 잡고 늘어진다. 이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함을 잘 알지만 그러지 못했다. 뭘 쫓고 있는지도 몰랐던 방향이 없던 나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뭔지 모르지만 이것마저 놔버리면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니까, 죽자살자 물고 늘어져야 했다.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하여, 이 한 문장으로부터 나는 나 자신을 구원하기로 했다. 더 이상 과거에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미래에 살지도 않으리라 선언한다. 오늘을 살겠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 최선을 다하자. 하루만 멋지게 살자고, 후회 없이 배우고 사랑하고 나눠주는 멋진 하루를 보내자고 생각한다. 물론 늘 떠다니는 ‘생각’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늘 지키긴 쉽지 않고, 가끔은 그냥 흘려보내는 하루도 물론 종종 발생한다. 그럴 때마다 난 떠올린다. ‘몸, 마음, 영혼’을 위한 안내서이자 마음속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이 책을 건네준 사람의 마음을, 아주 특별하게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