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세이] 봄이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두려움이라는 어떠한 형상이 없는 실체를 버리고 나니 내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아직도 사래가 걸린듯 가끔 주춤하긴 하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모색하고 있으니 분명 발전하는 것이리라. 내 생각과 가치는 주변 환경에 의해 늘 변화한다. 여태까지 나를 쌓고 채워온 모든 이데와 사람, 그리고 마음가짐이 지난 과거의 나를 꺼내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자체적인 질문과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한 인연과 오간 대화에서 영감을 얻어 지난 몇년동안 기록해놓은 퀘퀘묵은 기록을 끄집어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긍정적인 에너지로 하루를 채우고 있는 현재와 그렇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맞세우는 일이란 생각보다 번접스러웠다.
도전해야 할 새로운 공부량에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지난 날의 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여유따윈 가지지 못했다. 매일 마주하는 수많은 질문들과 씨름하던 나는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고 있지만, 한가지 변화한 점을 찾으라면 그래도 있지 않을까? 그토록 많은 일들 가운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다른 무엇이 아닌 내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면적으로 늘 마주하던 두려움의 실체를 그래, 넌 거기 있구나 라며 인정하고 나니 지난 시간동안 그렇게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어깨가 훨씬 편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12월 한겨울 속에 서있는 나는 봄을 느낀다.
분석하고, 탐구하고, 관찰하고, 설명하고, 교육하고, 홍보하고, 지지하고, 실험하고, 해석하고, 저항하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어나는 현재의 일들. 21세기를 살아가는 누구라도 자신의 무엇으로라도 소통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라는 어느 한 시인의 말을 듣고 난 후, 옅지만 확실한 방향성이 잡히고 있으니 감사한 날들이 지나간다. 무대란 모두에게 열려있는 소통의 장이다. 음악이란 키워드로 소통하는 뮤지션들과 그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관객들. 모두가 관객이고 주객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자전적 기록물이 갖는 힘과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누구라도 나의 음악에서 위로를 얻기를 바래왔고 지금도 바란다. 나의 주관적인 세계를 음악이라는 언어로 전달하는 위한 방법을 늘 탐구하고 해석하는데 전력을 다했던 지난 시간이 전해질 수 있을까.
영상 10도였다. 길을 걷다 봄이 왔나 착각이 들 정도로 따듯한 날씨에, 가벼워진 마음을 새로이 안고 나는 변화했다. 그동안 내 관객들도 많은 변화를 거쳐왔을 테다. 그렇기에 한낱 잠시라도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12월 한겨울 속에 서있는 나는 봄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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