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 나이’ 보다 ‘마음의 나이’가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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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일 전, 페북으로 교류를 나누는 강남순 교수님의 한 포스팅의 한 지점에 깊이 공감하는 경험을 한 이 후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바로 한국적 위계질서에 관한 글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나 또한 매일같이 겪는 부분이다. 프랑스에서 만나는 한국인은 만나는 사람들중 비율이 1/10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을 우연히라도 만날때면 소통의 과정과 그 모양새가 굉장히 달라진다. 위계적 언어구조와 생각이 바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유방식 자체도 ‘한국적’으로 전이시켜야 한다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단언컨데 이 과정은 외국인 동료들과는 가질 수 없는, 아주 다른 경험이다.


 학교에서 3년째 같이 마스터 연주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동료들과는 단 한번도 서로의 나이를 궁금해 본적이 없다. 지금까지도 그 친구들이 몇 살인지 모르며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존댓말을 해야하는지 반말을 해야하는지 고민해본적 또한 없다. 나이가 많든 적든 자신의 위치성을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것이 ‘한국적’을 이루는 구성요소 중 매우 중요하다는 교수님의 말에 공감을 더했다. 분명한 생물한적 나이를 따지고 나서야 또는 대학 ‘입학연도’와 같은 방식의 질문으로 시작되는 ‘한국적’ 관계는 확실히 내게 기시감을 안겨준다.


 글 중 ‘보이지 않는 해’ 라는 구절이 그 어느 것보다 정확한 진단으로 느껴진다. 한국인의 위계질서는 표피적인 문제만이 아닌 사적 영역에서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늘 행하려 노력하는 부분인 ‘탈배움: 이제까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뒤집는 것’ 과 마찬가지로, 탈위계적 관계형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최근에 유투브를 켜놓고 듣다 눈에 띈 영상이 있었는데 (클릭해 보진 않았지만) 대략 이러했다. 한 연예인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센’ 이미지를 강조하며 드러내는 맥락에서 새로운 패널에게 ‘몇살이세요?’ 란 질문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 질문이 함구하고 있는 바는 여러가지라고 볼 수 있겠다. 질문자 주변의 모두를 경악케 하는 표정이 가득한 썸네일 이었는데, 이유는 그 질문의 의도가 분명하게 ‘위계질서’를 세우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처럼 한국에서 대부분의 관계는 나이로 시작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우리가 집중해야하는 부분은 사람의 생물학적 나이가 아닌 마음의 나이라고 이야기 하시는 교수님. 읽고 나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글을 쓰며 이에 대해 늘 고찰하는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 또는 오해가 생길 때 등 나의 몸과 정신을 해체하여 온전히 내어주고 싶은 답답한 때가 종종 생기는데, 주관적인 견해로는 이것이 서로의 마음의 나이가 달라서가 주된 이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늘 탈배움을 지향하는 나는 내가 믿고 있던 것들과 알고 있던 것 모든 것들이 나를 둘러싼 환경과 개념들로부터 매번 바뀐다. 책임적인 이성적 소통을 원할하게 이어갈 수 있으려면 편협한 생각과 방법을 고집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어려울 수 있다. 그 누구도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으며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지도력을 가질 순 없다.


 강남순 교수님의 ‘한국 사회의 개혁, 어떻게 가능한가’ 글에선 누구나 자기 삶의 정황에 따라서 또는 학습의 결여 때문에 소위 ‘인식론적 사각지대’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한국에서 도드라지는 ‘꼰대 세대’가 비상하게 된것은 이 인식론적 사각지대를 나 또한 가지고 있으며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함을 망각하는 집단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마음의 나이를 내가 측정할수 있다면 아마 새로운 앎이나 의미추구에 대한 배고픔이 적은 나이가 아닐까. 늘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으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 꼰대로 비춰질 수 있음을 경계하려 노력한다.


 마음의 나이를 지속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만큼 그 젊음을 지켜낼 수 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된 이 포스팅으로 인하여 나는 또다시 성찰 영역을 넓혀가고 탄탄히 다져갈 수 있었다. 질문하는 것은 전혀 부끄럽거나 창피한 일이 아니다. 어떠한 ‘질문’을 품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함은 자명하다. 지순하고 지적 영역에 대한 탐구력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늘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기를, 따스하며 모두에게 평등한 질문의 장 또한 지속해서 열려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