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사람을 담는 기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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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관계를 맺을때, 타인을 판단하는 각자의 기준을 갖고있다. 나 같은 경우, 그 사람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어떤 행동과 책임을 지는 길을 걸어왔는지-가 그 사람을 내 마음에 담는 기준이 된다. 타인에게 악의적인 해가 되는 행동을 한 과거가 있다 해도, 본인과 상대방 둘 다에게 영혼을 상처입히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해도 ‘나’의 일이 아니라면 외면해도 괜찮은 걸까? 타인에겐 무자비한 일을 저지른 악마여도, 내게는 천사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라면 상관 없는 걸까?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나와의 이익만을 따지며 모른척 해야 하는것이 옳은 것일까. 사람에게 마음을 긋는 일이란 대체 뭐길래 이렇게 어려울까.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학원을 다니던 시절, 같은 반의 한 친구가 유독 몸집이 왜소한 친구를 괴롭히던 행위를 일삼았다. 육체적인 폭력을 가한 것은 아니었으나 모두가 공연히 느낄 수 있는 한 친구를 향한 강한 적대감은 멈추지 않고 한 학기 내내 지속되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나와 친구들은 가해자인 친구에게 정신적인 폭력, 즉 왕따도 폭력의 일종이라고 제지 했느냐, 아니였다. 우리는 그 일과 별개라고 생각했고, 가해자인 그 친구를 여전히 좋아하고 따랐다.


 늘 유쾌했고 싹싹해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 받았으며 자신의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 영특한 친구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늘 천사같은 미소로 고민을 들어주곤 했고, 늘 방과 후 맛있는 떡볶이를 먹으러 가곤 했다. 일단은 내게 해가 되지 않으니 타인의 고통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우리는 잠시나마 죄책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잠시뿐이였고 피해자인 학생의 괴로움을 나몰라라 한채 그 친구와의 관계를 지속했다.


 하지만 내가 외면했던 것은 나의 초라한 양심 뿐만이 분명 아니었으리라. 내가 외면한 것은 나에게는 웃는 얼굴을 하는 친구, 그 친구의 이중적인 생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고통받는 한 영혼 모두였다. 진정으로 그 친구를 사랑했다면 이 모든 것들을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린 마음에 적지 않은 죄책감으로 한동안을 흘러 보내고 나서야 내 친구에게도, 괴롭힘을 당했던 친구에게도 결국은 상처가 될 일이였음을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 일은 사람을 마음에 들이는 일에 있어서 그를 판단할 수 있는 나만의 기준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아직도 떠올리며 필요 이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하여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이 닿는 곳을 외면하는 일은 하지말자고 다짐한다. 결국은 내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말자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자신만큼은 속이지 말자고 말이다.


 그 사소한 기준이란 단순하다. 일단 삶은 복잡하고 관계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 첫째, 가운데서 얼마나 한 영혼을 진심으로 대하는가, 둘째 타인을 얼만큼 배려하는가, 셋째, 나의 감정과 그리고 행동에 책임을 지는가 이 세가지를 지키는 것이 기준이 된다. 이는 물론 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단순하지만 쉽지는 않은 것이, 이를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힘든 삶의 굴레 속에서 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과 그에 따르는 모든 것들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지키는 것. 이는 개개인의 양심에 따르는 일이기도 하지만, 최소한 이 세가지 기준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내 자신에게 무언가를 속이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셈이기에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스스로가 과연 그러한 기준에 적합한, ‘인간됨’을 실천하는 사람인가를 성찰함도 중요하다. 나는 세상적인 판단 기준이 아닌 진정한 인간됨을 실천하는 사람인지 질문 하였을때 모든 괄호 안에 들수 있는 기준의 ‘좋은’ 사람일까? (난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과연 나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가. 강남순 저자의 ‘용서에 대하여’의 한 문구가 떠오른다.

타자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성적,언어적,정서적,신체적,경제적,종교적 폭력 등 다양한 양태로 타자와 상처를 주고받는 정황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용서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어느 메세지에서 나는 용서를 할 수 있는지, 또한 용서받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타인으로부터 용서를 구하기 전에 나 자신 스스로를 용서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죄책감은 꽤나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기에 나 자신과의 꾸준한 대화를 통해 용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내 자신을 용서하고 나면, 진심으로 타인을 마주 할 용기도 생길 것이다.


  언제부턴가 사람을 마음에 들이는 나의 필터에 우울증이 스멀스멀 번지기 시작했고 사람을 믿는 데에 있어 짙은 회의감이 올라온다. 어찌되었든 간에, 인간적으로 실망을 하는 것 즉 나의 감정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앞으로의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앞으로 어떠한 태도를 가질지, 마음에 선을 얼마나 그어놓을지, 상대방을 들이지 말지 고민하는 데 있어 조금 더 현명해져야 하는 것 등을 고찰하는 것이다.


 사람은 늘 성장의 기회를 갖는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고 배려하는 것, 인간됨을 실천하는 것,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 이 간단한 기준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테고, 확고할 부분이다. 그렇기에 조용히 응원하며 바란다. 앞으로도 진심을 아우르는 요소들을 사랑하는 삶을 지향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성장을 멈추지 않기를, 마음에 담아지기를. 나의 염원으로 고통이 줄어들기를. 그리고 용기를 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