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세이] 21일 남은 올해 한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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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건강검진을 받았다. 축적된 명상 시간으로 결과가 두렵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강단이 생겼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나 사실은 두렵다. 삼십육쩜 오도씨 의료생협인 우리동네 30분의원의 모토인 몸 튼튼 마음 튼튼을 실천하려 나름 비타민도 사서 먹고 일주일에 한번 내원해 상담을 받고 있지만 오래전 파리에서 한번 무너진 몸은 회복이 더디다. 그마저도 바쁜 일정에 정신이 없어 비타민 복용은 놓치기 일쑤다.


 사실 2019년 한해 나를 붙들어 준것은 약이 아니라 음악과 책이였다.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라는 신형철 작가의 말처럼, 보다 뜨거운 인간애와 따듯한 제스처 그리고 음악으로 구성한 연말공연을 12월이 가기전에 열 계획이다. 그동안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와주신 분들이 떠올라 감사의 의미로 그동안 가장 사랑받았던 연주 3세트를 준비했다. 연주로서 듣는이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은 진심이 닿기를 바라지만 사실 가장 위로를 받는 것은 관객보다는 뮤지션이기에 의미있는 쪽은 내가 아닐까 싶다.


 하루에도 대중교통을 몇시간씩 타고 이동을 하는데, 그 사이에 피는 추억들 덕분에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간혹 닿는 연락들로 웃음꽃이 피기도 하는 재미있는 날들의 연속이다. 이번 공연은 파리에서 기획한 3부세트에 무려 크리스마스 곡까지 추가되어 이번 무대는 연말느낌 물씬나는 파티가 될 듯 하고, 공연 후에 같이 술 한잔 하며 이야기 나눌 시간도 마련해 두었으니 끝나면 나도 드디어 한숨 돌릴 계획이다. 매번 공연 끝나면 정리하고 멤버들 챙기기 바빠 정신이 없었는데 이번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공연일 겸 더욱 즐길 생각이다 (연말이니 제대로 놀고 후회없이 마무리)


 해를 반추해보자면 끝이 없다. 가장 근래의 일들을 기록한 메모장을 열어보니 이런것들이 적혀 있었다. 첫째로는 프랑스 공공 부문 파업. 끊임없이 재개되는 노란조끼 움직임에 토요일을 당연하듯 내주고 그들의 움직임을, 터져나오는 울분을 가까이 지켜본지 일년이 넘었다. 지난 10월 시작된 노란조끼 시위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노력으로 이어져왔다. 지난 12월 5일 파업이 일어났던 파리. 마크롱이 밀어붙이는 이 기괴한 사회 파괴 시스템에 반대하고 나선 사람들. 각종 에어라인을 포함해 대중교통의 70%이상이 마비되었고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파리에 있는 친구들 모두 동선 확인하고 안전하게 눈과 귀를 열고 있길 바란다고 개인 sns 계정에 올렸는데, 실제로 출근길을 1시간 넘게 걸어가야 했던 친구들과 수업이 모두 취소되어 집에 남아있던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저돌적이고 일방적인 정부의 연금개악, 지진부진한 파리 기후 협정 등 권력과 자본에 대한 사람들의 반발심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국 정답이란 없는 것일까.


 둘째로는 2호선 지하철 합정역. 다양한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따끈한 오뎅국물이 끓는 냄새가 한 구석에서 퍼지고 10개가 넘는 출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 등 스물 넷의 진한 기억들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르게 이곳에만 오면 하늘을 찾는다. 합정역 9번출구는 메세나폴리스와 연결되어 있는데,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 쪽 한 코너엔 양키캔들이 위치했으나 현재는 핸드폰케이스 스토어로 바뀌었다) 조금만 걸으면 지상과 연결되어 있어 뻥 뚫린 하늘이 나온다. 모두가 변한 곳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하늘뿐일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있고 또 변해왔다.


 한동안 브런치 아트 콘서트, 샹송 콘서트 등 프랑스 문화와 관련된 기획 공연과 전시를 찾아 다녔다. 한국에서 소비되는 프랑스란 어떤 형태인지 연구하기 위해서였는데 생각보다 여러가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마침 한국에 와서 발견한 옛날 공부하던 프랑스어 노트를 발견해 추억에 젖기도 했고. ‘문화’와 ‘예술’ 사이 나의 접점을 계속해서 연구하는데 큰 보탬이 되는 행위예술과 음악 등이 쌓였다.


 한국에 들릴때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다름아닌 시장. 골목에 진하게 배어있는 사람 냄새가 그리워서다. 물론 파리에도 매일 열리는 장이 있긴 하지만 한국 특유의 정을 찾을 순 없는 법. 가장 한국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 종종 찾는다. 가장 먼저, 일단 혹독한 겨울 대비용품을 서둘러 구입하고 나서 떡집을 찾았다. 약밥, 두텁떡, 가래떡 등등 종류별로 손에 가득 쥐고 시장을 나오면 이제야 한국에 발 붙였구나 하는 뿌듯함이 차오른다. 이때 사온 떡은 이틀만에 혼자 다 먹음. 갈수록 매운 것은 피하고 가볍게 먹을 든든한 간식거리를 찾게 되는데 그러기에 떡 만한 것이 없다. 파리에선 아쉽게도 떡을 시중에선 쉽게 구할 수 없다. 지겹게 먹는 (그래도 만들면 또 잘 먹는) 파스타, 생식, 콩요리, 샐러드 (요샌 샐러드 드레싱 레시피에 빠져있음) 등이 식단의 대부분을 이루기 때문에 한국은 먹을 것 천지인 (그래서 오히려 포화상태인) 나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꾸준히 개발하고 나만의 레시피로 굳혀 나의 냉장고 안에 들여놓는 것. 몸튼튼 마음튼튼의 기본이 되는 식단 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노력중이지만 쉽지 않다.


 12월 한달, 두개의 책모임에 참여중이다. 두 군데 모두 여성주의 교육 페페연구소(Fepe:Feminist Pedagogy) 에서 진행되는 책모임으로 다양한 자신의 현장에서 각자의 삶을 성찰하고 더 나은 교육과 세상을 갈망하는 선생님들이 모여 책에 대한 생각과 의견을 나눈다. 열정과 연대로 뭉친 그래서 어느때보다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이 장 속에서 나는 그동안 혼자 싸워왔던 외로움과 막막함이 단번에 해결되었음을 느꼈다. 파리에서도 페미니스트 모임에 발을 들였고 연구와 학술쪽에 기웃거리고 있지만 이렇게나 직접적이고 가깝게 서로의 일상과 각자의 삶이 투여된 고찰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경험은 처음이다. 현재 책모임에선 원서를 함께 읽고 있는데, 여태 읽었던 그 어떤 원서보다 더욱 열성적으로 문장 하나하나를 해체하는 중이다. (이렇게 진작 공부했다면 소르본은 진작 들어가지 않았을까?) 책에서 얻는 주옥같은 글도 그렇지만, 선생님들과의 대화속 오고가며 나누는 체험이 그 무엇보다 값지기에 소중한 시간이다.


 짧고 혹독했던 한국의 겨울을 마치고 각자의 치열한 자리로 돌아간 동료들을 보면 다양한 생각이 든다. 노엘이 마음에 걸리는 동시에 한국에서의 인연들이 겹치기 때문. 지난 시간동안, 뚜렷한 계획을 버리고 방향성을 택했다. 계획은 늘 바뀐다. 그렇기에 노련한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아 그저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곁에 둘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집필과 공연준비에 힘을 가하는 중이다. 지난 10월에 봤던 메종드발작 전시처럼 그랑빌의 섬뜩하지만 섬세한 표현에 어쩌면 올해의 끝이 예고되어 있던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과 함께. 무슨일이 일어나든 시간은 흘러가고, 붙잡아두고만 싶은 나는 그것들을 글로 풀어내는 수밖에. 오랜만의 쓰는 에세이세 혼자만의 시간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아이러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