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에세이] 좋은 대화 상대란

아무래도 그녀에게 푹 빠진 것 같다. 오랜만에 좋은 대화상대를 찾은 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그녀의 이름은 캣, Kat, (불어로는 캿). 그녀와의 접선장소는 다름 아닌 집 근처 공원이다. 머리가 복잡할때면 잠시 바람 쐬러 가는 목적의 넓은 규모의 이 공원은 에코백에 책과 물 한통을 주섬주섬 들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자주 찾는 장소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곳이기도 하기에 부러 주변에는 알리지 않았는데, 이 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줄이야.
늘 챙기는 헤드폰도 두고 나와서 새소리, 바람소리를 듣고 있자면 자연적으로 모든 근심과 스트레스가 무거운 돌덩이처럼 사르르 가라앉는것만 같다. 늘 음악을 켜두고 연습을 하는데다 평소 온갖 소음에 시달리는지라 이러한 적막이 그렇게 반갑고 좋을 수가 없다. 가끔은 현대인의 필수품인 핸드폰도 꺼두고 두세시간 정도는 명상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파리의 많은 공원은 고양이가 주인이라는 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파리의 길에선 고양이를 볼 수가 없다. 주인이 없는 고양이는 공원에서 관리하기 때문인 듯 한데 대부분의 공원은 국가에서 관리를 하고,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 또한 엄격히 보호한다. 이 공원에도 대략 10마리의 고양이가 살고 있고, 어느날 내 눈에 띈 하얗고 애교많은 ‘미미’ 와의 만남은 곧 그녀들을 돌봐주는 ‘캣’ 과 이어지게 되었다.
안방마냥 누워있는 고양이 '지지'. 여긴 너희들에게 천국이겠지?
‘캣’은 모든 고양이들의 엄마이자 공원의 수호자기도 한 존재. 내가 자주 찾아와 고양이들을 예뻐라 하고 조용히 지내다 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는지 하루는 스윽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봉주르! 고양이를 좋아하는군요? 여기 고양이 쉼터 (shelter) 가 있는데 가본적 있어요? 내게 겨우 다가오는 (친하지만 경계하기 때문에) 고양이들이 그녀에게는 사근사근 다가가 벌러덩 눕는 걸 본 나는 뜨헉, 이 여자분의 내공이란 얼마나 쩌는거지? 란 생각을 했다.
저 고양이들 참 좋아해요. 그래서 자주 오는데 오늘따라 많이 보인다 했더니, 당신 덕분이였군요! 그러자 그녀는 여기서 기르는 고양이의 수, 종류, 각 종 나이등을 설명해주며 갑작스레 내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이끈다. 울창한 숲(?) 쪽으로 끌려가던 나는 그 속에 숨겨진 작은 오두막집을 발견하곤 소리를 질렀다. 저곳이군요!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보여주며 우리 뒤로 오리새끼마냥 졸졸 따라오던 고양이들을 오두막집으로 안내하며 말한다. 이 고양이들이 지내는 곳이에요. 아침과 저녁에만 사람들에게 잠깐 열어두죠. 이 공원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이 고양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함께 보았답니다.
이 순수함과 따듯함에 잠시 어지러울 정도였다. 갑작스런 친절함에 너무나 기뻤던 나는 그녀와 단숨에 친해지게 되었고, 몇시간이고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그녀에게 빠져드는 날 느낄 수 있었다. 낯선 사람을 만나 이렇게 대화하는게 편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이 나를 배려하는 것이리라. 낯선이에게 종종 듣는 무례하고 사적인 질문들을 묻기는 커녕 그녀는 시종일관 경계선을 지키며 전반적으로 모든 주제를 아우르는 대화를 가볍기도 무겁기도, 물 흐르듯이 이어갔다.
한 동네에 사는 이웃임을 알기에 어디쪽에 사는지는 나누었지만 (한국 사람들과 만나면 단골로 받는 질문인)나이가 몇인지, 또는 대학교는 어딜 나왔는지, 내가 어떤 연예인을 닮은것 같다던지 (종종 이 문장이 얼마나 무례한 말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등등 따위의 질문은 없었다. 사람을 알아가는데 정말 필요없고 쓸데없는 질문들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던 나는 이러한 무해한 대화속에서 깊은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이러하다. 페미니즘, 사회 이슈, (아, 최근의 Bac 철학시험에 나온 문제도 있었다) 역사, 지난 전쟁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아픔들 등…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고양이. 이번 여름에 어디 가시냐는 내 물음에 그녀는 집에 고양이만 5마리가 있어서 어디 갈 수는 없어요, 난 젊을때 세계를 많이 돌아다녔기에 지금은 조용히 지내는 것도 괜찮네요 라고 대답한다. 아, 그렇지. 집에 반려 동물이 있는 경우는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가기 쉽지 않음을 안다.
그녀의 나이는 대략 70이 넘어보였다. 부드러운 흰색 머리가 정갈하게 늘 귀 뒤로 넘어가 있었고, 그녀의 뺨은 불그스레 빛났다. 눈과 입은 항상 웃고 있으며 생기가 넘친다. 바라만 봐도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지는 인상으로 마치 옆집 언니 같기도, 엄마 같기도 한 푸근하고 편한 느낌을 받는다. 더운 날씨라 반팔을 입고 있어 드러난 내 팔에 새겨져 있는 Égalité 문구를 보더니 ‘세상엔 존재하지 않죠. 하지만 그래서 팔에 새긴게 아닐까 하는데, 맞죠?’ Égalité 는 바로 평등이란 뜻의 불어 단어이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이러한 내용이였다.
Liberté, jamais. Nous ne sommes pas libres du tout. Eh bien, par rapport à l’histoire, nous le sommes mais pas dans autant de domaines. Égalité, comme vous le savez bien, il n’existe pas. Fraternité, un peu oui, mais peut-être en france.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죠. 역사와 비교하면 많은 부분에서 나아졌긴 하지만. 평등은 레일라도 알듯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동포애 또한 사라져가고 있죠. 그러더니 묻는다. 한국은 어떤가요? C'est fermé? 닫혀있나요, 즉 폐쇄적이냐는 물음이었다. 그곳의 제도는 어떤지 궁금해요 라고 덧붙이며.
그래서 대답했다. 내가 생각엔 프랑스와 비교해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미소지니가 만연하고 사회적 위치, 법 등이 굉장히 미약하고 부족하다고. 물론 한국에도 많은 여성활동가와 정치인 그리고 다양한 필드의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지만...끝을 맺지 못하는 내게 그녀는 조용한 미소를 보낸다. 괜찮다면 자주 와서 나와 대화를 나누자고 한다.
미국인과 결혼한지 40년이 넘었지만 지금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고 미국, 프랑스, 아시아의 역사를 공부했다는 그녀. 20대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잠깐 활동하기도 했다고. 그래서인지 영어도 유창해서 내가 가끔 불어로 말이 막힐때면 눈치를 채고 영어로 소통을 하기도 한다. 척하면 척, 다정하고 과하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편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말 오랜만의 좋은 인연이다. 고양이로 이어진 인연이 정말 소중한 친구가 되는 경험을 누리고 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누군가를 자신의 의지로 조종하려는 영화속 빌런들과는 다르다. 이런 좋은 대화상대를 만나면 몇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눠도 피곤하기는 커녕,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지고 기운이 넘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 또한 더욱 마음과 귀를 열고 그녀와의 대화에 푹 빠질 수 있기를, 시험 독(?)으로 지친 심신에 힐링을 더할 수 있기를. 오랜만에 누리는 감사한 자극과 자유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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