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용기를 냈더니 햇살이 성큼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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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국에 가면, 백이면 백 약사님들은 내 안색에 담긴 피곤함을 읽어 내고선 몇가지 철분 비타민제를 추천해주곤 한다. 월경통이 심하며 피곤함, 어지러움이 생기는 이유는 철분이 부족해서 생긴 증상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평소 내 얼굴이 그다지 맑은 안색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뜨끔하는건 어쩔 수 없다. 약사님께서 나의 생활 습관이나 복용하는 약 등을 물어보시곤 그에 맞는 비타민제를 건네주셨다. 꼭 먹어야 한다며 자신도 이걸 먹는데 컨디션이 현저히 나아졌다고, 꾸준히 먹으면 좋아진단다. 먹고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뭔들이랴. 각종 비타민제들을 손에 들고 있자니 모두 구매해 주변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매일 밤샘 야근에, 만성 두통에 월경통에 시달리는 그녀들은 자신의 몸을 얼마나 챙기고 있을까?


 명절에 특히 안타깝고도 복잡한 감정이 다발적으로 일어나는데 이유는 다른데가 아닌 가족과의 역할분담 때문이 크다. 아들들이 아닌 며느리, 딸을 연락 1순위로 꼽는 할머니와 명절때면 (그나마 양은 전보다는 줄었다지만) 일주일 전 부터 장을 보고 레시피로 준비해야하는 각종 손이 많이 가는 산더미 같은 음식들. 주방과 제사상, 그 사이엔 우리의 엄마들이 피곤한 몸을 끌고 서있다. 추석때면 으례 해야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당연한 역활은 누가 정했는가. 가부장제의 혜택은 누리고 있지만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애매한 아빠. 그 전통을 끊어내야 하는 것은 누구의 몫인건지. 자식들에겐 명절 전통을 물려주지 않을 거라는, 너는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엄마아빠 세대는 우리와 어떤 다른 성질을 띄고 있는 것이길래 이런 불편한 상황이 반복되는 걸까. 명절은 수 많은 물음들이 떠오르는 시간이다.


 몇달 만의 연희동은 전보다 더욱 한산했고 내리 비가 온 서울 밤의 공기는 무거웠다. 틈날때마다 방앗간 처럼 들렸던 서점과 병원 빼고는 딱히 가야할 곳이 없었기에 밀린 일들을 순차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는데,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여성연대 컨퍼런스나 행사들이 전보다 눈에 띄게 생겼다는 것. 짧은 여정이기에 아쉽게도 전부 참여할 순 없었지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다녀오면서 관람한 영화속 여성 캐릭터들, 전에는 보지 못했던 서사들 그리고 공간 속에서 도드라지던 자매애는 강력했기에 그나마 위로를 해본다. 북클럽도 가입하고 책장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메말랐던 갈증을 조금은 채웠다고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퇴근 시간, 지하철 안. 집으로 가는 길, 문이 열려 정차하는 사이 밖에서 잠자리 한마리가 날아 들어왔다. 조용히 그러나 신기한듯 사람들 몇이 사진을 찍는다. 들판에 아파트 단지에 가득하던 잠자리가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나? 언제부터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을 떠올려보지만 기억 속 당연했던 것들이 이상하게도 더 이상 존재감을 띄지 않는다. 마치 도심 속 날아든 잠자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이 되는걸까. 나도 누군가의 기억속에선 지워져 있을까. 잠자리와 눈빛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건만 그의 기억 속 나는 참 초라하다. 일산은 멀고 퇴근길 사람들의 발걸음은 지쳐있었다.


 언제부턴가 조각들이 모이지 않는다. 평소 명상 루틴도 흐려졌기도 해서 정기가 부족했던 뿌연 며칠을 뒤로 하고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통해 또한 걸러지는 것들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갈 예정이다. 지하철 밖 풍경으로 떠오르는, 그 짧은 새 돈독해진 인연들이 벌써 그리운데 또 어딜 휙 떠난다는 건지. 몇번에 걸친 상담 세션에서 관계는 늘 되풀이 되기에 반복되는 늪에 빠져 내 자신을 돌보는 일을 놓치면 안된다고 정제닥님께서 조언해주셨는데 말 처럼 쉽지 않은 것을. 어디에 있던 마음이 중요함을,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또는 어떤 관계를 지향하고 싶은지 생각해야 함을 강조 또 강조. 하지만 모든 것이 부족한 내 탓인 것만 같은걸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방을 마음속에 짓고 싶다. 그 안에 모두를 차곡 차곡 넣고만 싶다.


 소박하게 꾸렸던 트리오 공연은 긴 연휴에도 불구하고 찾아와준 관객들 덕분에 만석을 기록했고 유쾌한 만남으로 이어져 밤 열두시에 마무리가 되었다. 무려 5년전에 공연에 오셨던 분도 또 찾아와주시고..홍보를 며칠 전에야 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주셨는지. 한국에 또 언제 오시냐는 질문에는 저도 모르겠다, 근황을 sns 로 올려드리겠다는 답을 드릴수 밖엔 없었지만... 큰 힘이 되었다.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연주를 준비하고 무대를 올리는 원동력이다. 함께 한 동료들과도 적지 않은 양과 질의 대화로 그동안의 갈증을 해소하고 그 외 감사한 피드백과 영상들에 넘치는 기운을 전해받았다.


 작은 용기를 냈더니 햇살이 성큼 들어온 듯 하다.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밤이 찾아왔고, 그 안에서 좋은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 힐링으로 이어진 고마운 시간에 그 어느때보다 편안한 수면을 경험했다. 몇년 만 이였다. 어떠한 관계이든 사랑을 바탕으로 행한다면, 이라는 가정을 실현시켜 준 고맙고도 놀라운 결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