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에세이] 좋은 사람들, 음악의 본질 그리고 좋은 글
음악비평서나 평론가들이 풀어놓은 ‘좋은 음악’에 대한 본질은 어찌보면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주제에 상관없이 듣는이에게 감동을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음악을 ‘탐구’할 이유를 점점 잃어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저 음악의 역사와 경계, 쌓인 음악가들의 축적된 업적을 익히고 자연화하는, 그리고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을 겪는 도중일 뿐이니까.
알렉스 로스의 음악비평서 ‘리슨 투 디스’에서는 ‘좋은 음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다루며 음악은 절대적인 가치 기준으로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개인적인 매체라고 설명한다. 때문에 최고의 음악은 세상에 다른 음악은 없다고 우리를 설득하는 음악이라고 정의가 내려진다. 팝이든, 롹이든, 재즈든 그 경계는 다양하다는 이야기다.
현대적 정의에 따르면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느낀’ 감정과 ‘산’ 경험을 공유하며 청중을 만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저 울고 웃는 광대가 아닌 인생이 녹아있는 음악을 연기하다보니 예술가란 타이틀이 이젠 어깨에 매달린 무거운 짐 마냥 부담스럽다. 어떻게 하면 과거로 퇴행하는 것이 아닌 현재를 강화하는 음악을 아우를 수 있을까. 나를 드러내는 공연한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자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단단한 예술성과 넓은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음악이 현재 나의 ‘좋은 음악’의 사전적 의미라고 본다. 전엔 내가 단지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즐기는 음악을 타인에게 강요하곤 했었다. 이거 좋지, 한번 들어봐봐. 아니, 이게 좋다니까? 쓸데없는 토론으로 시간을 낭비해가며 내 얕은 음악에 대한 이해도를 굳이 설득시키려 노력하곤 했었다.
하지만 개성과 취향에 따라 즐기는 음악이 다르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꼭 좋은 음악이라고 볼 순 없다. 그저 방대한 음악의 장르 속에서 바다모든 음악을 다 이해하고 듣는 것은 불가능하니 듣는 폭을 점점 넓혀가는 과정에서 추천해주고 싶었던 오지랖 넓은 마음이였을지도 모른다.
인생과 경험에서의 감정을 멜로디와 가사에 실어 노래하는 것이 좋은 가수가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세계관은 물론이고 나의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진정성 있는 음악이 힘이 있듯이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관계를 돈독히 해주는 중심이 된다.
진정으로 다가갔지만 본인의 필요에 의한 시각으로만 관계를 쌓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안부를 물었던 관계일지라도 식는것은 한순간이다. 그 애매하고 복잡한 감정선 밑바닥 속에 다다르고 나서야 진정한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예상은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차이는 있을지라도 본질은 같기에 나 또한 마찬가지일터. 하기에 나는 미련스럽고 답답해 보일지라도 차라리 담담하고 바보같이 상대방의 좋은 점만 찾고 골라 바라봄을 택한다.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더라도, 이건 사실 내가 취하는 이기적인 생존방식이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상대방이 순간의 이기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이 실수라는 판단하에) 이 사람의 진정성과 본심은 사실 심히 외롭고 여림을 알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행동의 본거지와 이유를 이해하게 되면, 복잡한 미련과 아쉬움은 사라지고 그를 진정으로 응원할 수 있게 된다. 평온한 상태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종종 그러한 상황들을 바라보는 내 시각은 안타까움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않으려 무던히 노력한다. 내가 뭐라고 감히 남을 평가하겠는가. 너무나도 쉽게 당신은 이래요, 누구는 저래요 라는 판단의 말을 내뱉는 사람들을 마주하다보면 순간 전의를 잃기도 하지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타인에게 무지와 무배려를 실천하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음악은 무엇이며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 정의를 내리고 싶은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속에 머물고 있다. 물론 음악과 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 남길 수 있지만 사람과의 관계만은 그렇지 않기에 늘 넘어지고 배우고를 되풀이한다. 그 속에서 큰 깨달음을 준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은 나를 내칠때까지 끝까지 어떻게든 물고 늘어질(?) 생각이다. 당신은 제게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못난 저를 부디 오래오래 감당해 내주시기를.
문득 주위 사람들이 내게 번복해서 전해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는 사람을 만날때 그들의 약한 마음을 잘 파악하고 그들이 네게 무슨 짓을 하더라고 끝까지 좋은 면만 보려고 해. 종종 시간낭비를 하게 되지 않니? 좀 투머치야. 어쩔 수 없으면 그냥 흘려보내기도 하고 마음에 담아두지마. 온정에 이끌리지 말고 너만 생각하라고 이 똥멍청아.
물론 내가 모든 사람의 좋은면만 보는 것은 아니다. 나의 초라한 변호론을 이야기하자면 한 사람의 심연의 밑바닥까지 겪고 나면(생각해보면 이것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리고 내 건강에 해롭다고 판단이 들 때라면 가차없이 돌아선다. 마음을 끊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대로,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번복의 동물이라 했던가.
내 과거의 경험상 내가 이렇게 매정하게 끝낸 관계들은 백이면 백 후회하고 다시 찾아왔었다. 본인들의 마음에 돋쳤던 가시들을 이제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며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고 나를 향해 다시 연락을 뻗곤 했다. 하지만 사죄 또한 옳은 타이밍의 흐름을 탄다는 것을 아시는지.
종종 사람의 선한, 좋은 면만을 보는 나의 이기적인 시선은 타인이 나의 좋은 부분을 발굴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이러한 마음을 알아주고 다가와주는 보석같은 사람을 만날때면 온전히 사랑으로 확장되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사랑표현을 아끼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내 모든 시간과 재능을 내어준다. 물론 이런 부담스런 마음을 받을 만한 깜당(?)의 사람이여야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좋은 사람들을 위해 쓰일 나의 모든 것을 평소에 착실히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나 자체가 더욱 선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본기를 책과 음악과 성찰의 힘으로 닦는 것이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나눌 줄 안다고, 자신들의 욕망과 계산으로 타인을 대하는 수법은 결국 자신을 더욱 외롭게 하리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스스로를 외롭게 하는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할 수밖에.
멀리 있어도 햇볕처럼 따사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 환하고 좋은 에너지가 내 음악과 글에 스며들기를. 용서와 사랑을 바탕으로 성장함을 멈추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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