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에세이] 엮고, 쓰고, 편집하고, 노래하고
새 노트를 샀다. 내게 기록의 습관을 채워주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필기’와 ‘필기구’가 있는데, 들여다 보면 이 둘은 의외로 단순함을 알 수 있다. 사실 뭘로 채울것인가, 그 안의 플래닝 또는 컨텐츠는 무엇인가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래는 무지의 일반 스프링 노트를 썼었는데 한 네권째를 다 썼을 때 즈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회색의 일반 제본 노트를 집었더랜다. 그리고선 그 노트를 다 쓸때까지 두고두고 후회했다. 왠지 노트를 다 펼칠때의 뻑뻑한 느낌도 마음에 들지 않고 무엇보다 스프링 노트 가장 앞뒤로 끼워져있는 탄탄한 판이 없었기에 지하철이나 벤치에 앉아 허벅지에 놓고 써내려 갈때 힘이 들었다.
부러 새 노트를 사기에는 낭비인 것 같아 그동안은 어찌어찌 쓰다가, 한국에서의 일정을 기록하며 마지막 장을 채웠다. 드디어 예전 노트를 살 수 있다니 !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기쁜 마음이 드는지. 바로 새 노트를 구매해 첫 장에는 늘 그랬듯 그동안의 기록 중 가장 중요한 정보 몇가지를 다시 옮겨 적어 내려갔다. 아무래도 아날로그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터라 이렇게 모든걸 쓰고, 엮고, 적어야 마음이 편하다. 굳이 손글씨를 고집하는 이유로는 공책과 컴퓨터, 핸드폰을 죽 펼쳐놓고 열심히 옮겨가며 정리하는 과정에서 창출되는 아이디어들도 의외로 빈번하기 때문인데, 이런 기록의 중요성을 늦게나마 깨달은 후론 열성적으로 남기고 있는 중이다. 전에 올려놓았던 포스팅에서도 ‘기록’의 중요성을 마구 강조해 놓았는데 그동안 쌓인 조각들을 엮어보니 꽤 되는 듯. 슬슬 편집하고 묶는 작업도 조만간 시작해야지.
가을이 내게 성큼 다가왔다. 아침 산책을 하며 스쳤던 가을 냄새가 코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정도.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다시금 몸서리 치며 나를 봐달라고 애원하는 계절. 겨울로 넘어가는 간이역 같은 계절이라지만 곁에 붙잡아 두고만 싶다. 겨울이 오면 또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예전 학생과의 있었던 썰이 문득 떠올랐다. 영단어 Distance 를 명사로 예문을 적는 과정에서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There was a long distance between them. '그들 사이엔 먼 거리가 존재한다' 응, 잘 만들었네. 근데 조금은 슬픈 말이구나. 라고 말하자 바로, “샘, 그럼 몸이 먼걸로 해요. 마음까지 멀면 너무 슬플것 같아요. 헤헤” 라며 웃어보였다.
아이들이 내게 주는 에너지란 실로 엄청나기에 그때 그때 조각내어 소중히 마음 속 상자에 담아 놓는다. 아이들에겐 종종 이러한 순수함이 도드라지고, 그걸 목격할 때마다 특별한 보석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문득 저 문장을 듣자마자 스누피:더 피너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샐리가 스누피를 위로하며 “왜그렇게 힘들려고 애쓰니? 그만해. 사랑하는 사람이랑 떨어져 있는 거.” 라는 말을 건넨다. 꼭 안겨 우는 스누피의 슬픈 얼굴을 보며 나도 그래, 사랑하면 같이 있어야지. 왜 떨어져서 힘들어야 할까. 란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심지어 어린 아이마저 잘 알고 있다. 사람이 마음까지 멀어지면 슬프다는 단순한 사실을.
사랑한다는 말이 가진 진정한 힘의 파급력은 얼마일까.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배움에 관하여’ 등의 저자 강남순 교수님의 책엔 이런 말이 쓰여있다. “영어로 사랑 love 는 명사이기도 하면서 동사이기도 하다. 즉, 사랑은 만져지거나 보이지 않는 가치를 담고 있는 심오한, 그래서 추상적일 수 있는 ‘명사적 개념’이면서도 구체적 행동을 예시하는 ‘동사적 개념’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구체적 삶 속에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 또는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것’처럼 한 개인에게 삶의 에너지를 주고, 살아감의 의미를 충족시키는 강력한 그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도처에서 남발되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상투성을 느끼지만,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은 그 자체에 무게가 실릴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욱, 그 진정한 의미는 퇴색되거나 변질되지 않았으면 한다. 내게 사랑이라 표현하던 그들은 그 말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을까. 단순하기도 하지만 직관적이게도 마음을 통과하는 그 단어가, 나를 진정으로 잡아주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정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최근에 도서관에서 용혜원 시인의 시집 내 마음에 머무는 사람을 다시 읽었다. 몇 시들은 적어놓기도 했는데 언제봐도 참 따듯한 구절들이라 부분만 발췌해 공유.
내 마음에 머무는 사람
한 순간 내 마음에 불어오는
바람일 줄 알았습니다.
이토록 오랫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고
머무를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는
잊을 수 없는 여운이 남아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아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만남과 사랑이
풋사랑인 줄 알았더니
내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사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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