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구원자, 코즈모폴리터니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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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를 위하여:비판적 저항으로서의 인문학적 성찰', '배움에 관하여: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용서에 대하여: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코스모폴리터니즘과 종교:21세기 영구적 평화를 위하여' 등의 저자인 강남순 교수님과의 첫 조우는 올해 여름,북카페 두잉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이분에 관해서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여름 내내 고민하며 정리해 놓은 노트가 있는데 언제 끝낼수 있을까 싶어 작업중 잠깐 머리를 식힐겸 잠깐 페이지를 켜고 시작을 끊었다. 한 권 한 권 다 풀어내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것 같아 일단 정리한 만큼만 얘기하는 강의 노트 공유 정도가 되겠다.

    강남순 교수는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 대학원 교수로, 독일과 미국에서 공부했고 한국과 영국의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나에게 자크 데리다란 철학자를 알게해준,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비판적 성찰과 글쓰기에 대한 가르침을 책을 통하여 그리고 강의를 비롯해 많은 독자들과 소통의 장에서 알려주시는데 주저하지 않는 고마운 분이다. '코스모폴리턴 이론' Cosmopolitan theory 에 대해서는 누구가 어디에서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정의, 환대와 사랑의 문제에 학문적, 실천적 관심을 두고 다양한 국제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 저자는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이며, 온전한 용서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책을 출판했다.

    이 분을 어떻게 알게 되었냐 하면, 아직 계정으로만 남아있는 내 빈 껍데기 같은 페이스북를 지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서, 독자들과 그리고 자신의 글을 읽는 어떠한 사람들 과-현대 가장 큰 이슈중 하나인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고 풀어나가는 대화의 장인 한 페북 페이지에서 만났다. 그 발판에서 내가 얼마나 무지했음을 깨닫고 성장했으며 그 깨달음으로 내 안의 모든것을 초토화 시키고 구원받았는지는 오직 나만이 안다. 스팀잇에 여러 형태와 관심사의 글을 풀고 있지만 어느 구체적인 방향으로 소통을 이루어야 할지는 여러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지해야할 나의 숙제이기도 하는데, 그 길에 큰 도움을 받은 몇 책의 몇 구절을 인용하여 얘기해보자 한다.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또 얼마나 다채로운 색깔의 인종과 또 그에 따른 차별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는 사람 이라면, 이 저자가 말하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의 근원적 메세지인 '무조건적인 환대와 정의, 사랑'의 풀이를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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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책을 양적으로 많이 읽고 여러 강연을 듣는다 해도, 비판적 성찰 없는 배움이란 '정보의 축적'일 뿐이다. 비판적 성찰 없이 책이나 선생으로부터 받기만 하는 수동적 교육과 배움은, 다양한 차별과 억압적 구조에 대한 예민성을 길러주지 못한다.
<배움에 관하여>, 저자 강남순

    아직 세계 공통적으로 이루어지는 많은 이슈중 '차별'의 키워드에 포함되는 일이 비일비재 한다는걸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시기, 궁금해서 찾아 본적이 있다. How many types of discriminations are there? 세상의 억압과 차별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간/직접 경험을 자/타의적으로 하며 살고 있기에 늘 궁금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현시대의 차별은 생각지도 못했던 다양한 종류로 나뉘어져 정의되고 있었다.

  1. Sexism 성차별주의

  2. Heterosexism 성 소수자 차별주의

  3. Cisgenderism 성 정체성이 사체적 성별과 일치하는 주의

  4. Classim 계급주의

  5. Racism 인종차별주의

  6. Colorism 피부색이 다른 (어두운)사람들에 대한 차별주의

  7. Ableism 장애인 차별주의

  8. Lookism 외모지상주의

  9. Sizeism 외형 차별주의 (뚱뚱하거나, 마른사람에 대한)

  10. Ageism 나의 차별주의

  11. Nativism 이민 배척주의

  12. Colonialism 식민주의

    정도로 나뉘어져 있는데, 여기서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이슈화 되고 있는 차별은 무엇일까 하니, 하나만 콕 찝어서 얘기 하기 힘들정도로 우리 사회속엔 수많은 차별과 혐오가 공기처럼 무수히 깔려있다. 차별과 혐오라고 하면 자극적이기만 한 키워드 같이 느껴질수도 있다. 꼭 19세기 로마에서 처럼 화형을 시키고, 온몸에 불을 지르거나 성 밖으로 쫓아내는 것 등 같은 수준과 이어지는 차별과 혐오만이 능한것은 아니다. 내 시선이 닿는 곳, 내 생각이 머물고, 내 몸이 배척을 하게 되는 그 방향의 끝을 자세히 보면, 최소한 이중 한 카테고리의 차별의 그늘에 드리워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남성은 언제나 :발화의 주체(speaking subject)로, 여성은 발화의 객체(spoken object)로 살아오고 있다. 새해를 맞이하는 JTBC 의 "2018, 한국은 어디로 가나"라는 신년토론 프로그램과 같은 것을 보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여성배제가 이렇게 자연스럽고 일상화되고 있는가를 보게된다..(생략)..더욱 심각한 문제는 '남성-비장애인-이성애자'들만 모여서 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고 있는 이러한 장면들이 단지 한 TV 프로그램에서만이 아니라, 종교, 정치, 경제, 교육, 언론 등 한국 사회 곳곳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펼쳐지고 있는다는 사실이다.
<일상화된 배제와 차별: "상상으로 하는 실험" 에의 초대>, 저자 강남순

    <용서에 대하여>에 대해서 풀어보자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봄으로 생각해 보고 싶은데,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감정을 표출할 때, 스스로 큰 타격을 받은적이 있는가? 당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때, 그가 느끼는 고통을 같이 느껴본적이 없는가? 를 던져보겠다. 전 <센서티브:Highly Sensitive People> 에 대해 쓴 글에서 처럼, 민감한 사람들이 윤리와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풀어놓은 부분이 있는데 이 이론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 건설적인 전략이라고 믿는다. 언성을 높이는 공격적인 논쟁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참기 힘들어한다. 이성적이고 신중한 태도를 버리고 더 원초적인 방법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무례한 사람들과 자주 부딪치는데, 이것이 위에 언급한 억압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많은 예중 하나이다.

인종차별이나 계층차별은 우선적으로는 '공적 영역'에서의 차별이다. 예를 들어서 사적 영역인 가족관계에서 가족끼리 서로를 향해 빈민층이라고 차별하지는 않지만, 공적 영역에서는 빈민층으로서 갖가지 차별을 받는다. 반면 성차별은 공적 영역은 물론이고 사적 영역인 가족관계 안에서도 행사되는 차별이다. 그래서 성차별은 개별인들의 '침실'에서부터 세계 권력의 집중지라고 하는 '백악관'까지 존재한다는 말이 등장하기도 한다.
<인종,계층 차별과 다른 성차별>, 저자 강남순

    공부는 악기 연습하는 것과 같다 라는 말이 있다. 경험이란 것은 자기만큼 경험 한다는 것인데,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말이 있는만큼, 이 말은 쓰기도 자선적이지만 읽기도 자서전적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자기를 통해서 읽는 것이고 듣는 것도 자서전적이다. 자기만큼 듣는다. 그만큼 읽는 독자를 배려하고 자신이 쓰는 글에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의 가능성을 지우면 그 글은 (음악과도 같은 문맥) 똑같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악기배우는것과 공부하는것이 똑같다는 말은, 매일 훈련해야 하는 부분에서 그렇다. 악기는 하루를 쉬면 내가 쉬기 위해 자리에 놓고 왔던 그 자리로 돌아가기까지 이틀이 걸린다. 삼일을 쉬면, 또 일주일이 걸린다. 일주일을 쉬면, 한달이 걸린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꾸준한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것. 지금도 작업, 레슨, 모임, 각종 행사 등으로 깜빡 하루 이틀 연습을 지나치는 때가 종종 있는데, 마음 한켠에는 늘 불안하다. 그래서 정 연습할 시간이 없으면 전에 녹음해놓은 음원 파일이라도 스피커로 들으면서 할일을 한다.

    강남순 교수의 이야기하는 용서란, 왜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는가? 도대체 용서란 무엇인가?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 실제로 이 책을 읽기전 얕은 지식과 판단으로 내가 모든걸, 무조건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책이 아닌가 싶었지만 책을 마친후 나의 '용서'에 대한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이 책을 읽은지 채 1년이 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기 전과 후의 '나'란 사람의 인식세계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생겼다. 첫번째로 정독 하고 나선 다시 한번 읽어야 겠다 생각을 하고 올해 3월에 다시 한번 정독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읽어야지 하던 참에 파리로 가져오는 기내수화물에 넣는 다는것을 깜박하고 실수로 한국에 두고왔다. 글을 쓰기전 제대로 또 한번 읽어 보고 정리하고 싶은데, 마지막 장의 기억이 희미하다. 혹 이 책을 읽으신 분이 있다면 마지막장 5장의 용서의 두축 부분이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기에 도와주시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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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서없고 오로지 내가 읽었을때 남아있는 기억의 통로로만 걸어가며 풀이해놓은 이 포스팅은 큰 의미를 두고 쓴 글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강남순 저자에 대한 고마움이며, 그리고 이 글로 인해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에 조금이라도 흥미나 관심이 생겼다면 나는 반은 성공한 것이다. 스팀잇에 올라오는 여러 글들을 읽을때 스스로에게 큰 자극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성찰을 통한 내 성장판이 되든, 반 스승이 되든 어쨋건 나의 '배움'을 위해 지나가는 여러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 또한 누군가에게 발전할수 있는 공부감을 던져준 아주 조그마한 자극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